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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서에 관한 비평과 반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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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영자 0 5,264 2001-08-31 10:57

2.다니엘서에 관한 비평과 반증

다니엘서는 그 중요성 못지 않게 과거로부터 현금(現今)에까지 가장 혹독한 비평을 받아 온 책이기도 하다. 다음의 진술은 인상적이다.

[아무 다른 책도 이 위대한 책(다니엘서)만큼 그렇게 많은 공격을 받아오지 않았다. 거의 2000년 간이나 악한 사람들, 이교의 철학자들과 불신자들이 이 책의 권위를 분쇄하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이 책은 바로 그 위에서 비평자들의 망치가 산산조각이 난 모루(*망치의 밑받침)임이 증명되어 왔다. 다니엘서는 이 모든 공격을 물리치고 살아 남은 책이다.]

가.저자와 연대에 관한 비평

1. 고대의 히브리인들은 다니엘서가 정당한 성경임(正經性)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다니엘서의 기자(記者)와 연대 및 권위에 대하여 최초로 비평을 시작한 것은 서기 3세기 시리아 사람으로 헬라 철학자가된 포르피리(Porphyry)였다.

2. 그는 서기 233년 시리아의 두로에서 태어나 잠시 가이사라에서 초대교회의 위대한 교부(敎父)였던 오리겐(Origen) 문하에서 공부하여 한 때 명목적인 그리스도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에 로마에 가서 신플라톤주의 대표 철학자인 플로티누스(Plotinus)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철학사상을 온 세상에 전파하는데 생애를 바쳤다.

그는 이 철학사상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그리스도교에 대해 격렬한 증오심을 가지고 그 뿌리까지 뽑겠다는 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항하여](Against the Christians)라는 제목으로 15권의 책을 썼다. 다니엘서가 그리스도교의 기초 가운데 하나임을 발견한 그는 그의 책 제 12권에서 아래와 같이 비평을 가했다.

3. 즉 다니엘서는 다니엘에 의해 쓰인 것이 아니라 기원전 2세기 시리아의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us Epiphanes) 시대에 유다에 산 어떤 유대인에 의하여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다니엘서는 장차 올 사건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을 미래 시제(時制)를 써서 예언인 것처럼 썼을 뿐이며 저자가 알 수 없는 장래 일을 추측으로 그럴싸하게 쓴 것이라고 했다.

4. 포르피리의 공격의 촛점은 다니엘서의 예언 부분인데 반그리스도교적인 불신자요 이교 철학자인 그는 예언의 기능과 가능성을 전혀 불신하고 성경이 영감(靈感)되었음을 부인하는 합리주의적 입장에서 취한 태도인 것이다.

5. 포르피리의 이와 같은 반그리스도교적이고 불경건한 태도는 응징을 당하여 서기 448년 로마황제 데오도시우스 2세 (Theodosius Ⅱ)는 그의 모든 저서들을 불태우게 함으로써 그 폐해를 없애게 했고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Ⅰ세는 529년 이교 금지령을 내려 이러한 파멸적인 철학을 가르치지 못하게 했다.

6. 그후 포르피리의 가르침은 수세기 동안 기척이 없더니 18, 19세기를 직후해서 일어난 유럽에서 반성서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합리주의가 신학에 침투하여 고등비평이 일어나면서 다시 대대적으로 나타났다.

7. 즉 합리주의적인 고등비평 신학자들은 포르피리의 말을 이어 받아 다니엘서가 바벨론의 포로기간 동안에 다니엘에 의해 쓰여졌음을 부인하고 기원전 2세기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왕에 대항하여 일어난 유대의 마카비 왕조 독립운동 기간 동안 어떤 경건하고 애국적인 유대인이 광복투쟁을 북돋기 위해 쓴 것인데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다니엘의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참으로 수세기전 포르피리의 주장이 그대로 현대에 되살아난 것이다.

8. 이처럼 다니엘서의 예언을 기원 전 2세기의 작품으로 돌리고 그 내용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175-164 BC) 때에 성취된 역사로 돌리는 비평적 해석을 과거주의(Preterism) 라고 부르며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여기에 속해 있다.

9. 이렇게 다니엘서의 저자와 연대가 비평자들의 주장대로라면 다니엘서의 예언은 무의미해지고 다니엘은 선지자가 아니며 다니엘서는 위서(僞書)가 되고 만다. 따라서 예수께서 마태복음 24장 15절에서 말씀하신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의 문구는 "속임수를 쓴 자칭 다니엘이라는 거짓 선지자의 말한 바"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다니엘서를 직접 인용한 복음서와 바울의 서신들, 요한계시록도 모두 위서가 되고 말아 구약은 물론 신약성서 전체가 붕괴되고 만다. 특히 마지막 때를 가리켜 예언한 모든 예언이 상실됨으로써 성도들은 말세를 위한 노정(路程)을 상실하게 되고 그 결과로 일어난 1844년의 재림운동은 우스꽝스로운 촌극(寸劇)이 되고 말아 계시록 12장 17절에 언급된 남은 무리는 설 땅이 없어진다.

10. 다니엘서의 이러한 의미심장한 중요성 때문에 다니엘의 생전에 다니엘의 선지자적인 역할을 방해하고 그를 사자굴에 던져 넣고 그 친구들을 풀무불에 던진 사단이 이제도 그의 기별인 다니엘서를 같은 방법으로 비평의 사자굴과 증오의 풀무불에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요 신학자인 뉴턴(Isaac Newton)경은 아래와 같이 적절히 말했다.

[다니엘의 예언들을 부인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붕괴시키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인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그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세 친구를 풀무불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는 비평과 의심의 사자굴과 풀무불에 던져진 다니엘서를 옹호하시기에도 능하셨음을 지나간 역사에서 확증하게 된다. 아래에 다니엘서의 정경성(正經性)과 역사성(歷史性)을 입증하는 몇가지 반증을 든다.

1.역사가 요세푸스의 증언

요세푸스(Flavius Josephus)는 서기 37년 경(로마 황제 Caligula 원년)에 태어난 유대인 역사가로 사도 요한과 바울의 동시대 사람이다. 그는 유대 제사장 명문가의 태생인데 특히 그의 어머니는 기원전 2세기 유다의 독립을 쟁취한 마카비왕조의 대제사장 요나단의 자손으로 전해진다. 그는 다양한 경력과 뛰어난 지적인 배경을 가지고 고대 문헌에 기초하여 아담의 때로부터 서기 70년 자신이 목격한 바 예루살렘이 멸망당하기까지의 역사를 신빙성 있게 저술했다.

그의 저서 [유대인들의 고사(古史)](The Antiquities of the Jews)에서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샤와 그 동맹국들을 치기 위하여 팔레스틴을 정벌하던중 두로를 포위하고 유대인들에게 군수(軍需)지원을 요청했으나 당시의 대제사장 얏두아(Jaddua)는 자신들은 페르샤와 동맹관계에 있음을 밝히고 이를 거절하여 알렉산더 대왕을 격노하게 했다.

알렉산더 대왕은 두로와 가자시를 함락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진군하는 동안 겁에 질린 대제사장 얏두아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대제사장의 찬란한 복장을 하고 흰 예복을 입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거느리고 시온의 노래를 부르며 성 밖까지 나아가 대왕을 영접했다. 대왕은 이 광경을 보자 그들은 자신이 출정 전 본국에 있을 때 꿈에 본 무리들임을 기억하고 오히려 엎드려 유대인들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유대인과 예루살렘을 조금도 해하지 않고 대단한 호의를 베풀었다.

때에 대제사장 얏두아는 구약성서를 들고 나가 다니엘서를 대왕에게 펼쳐 보이며 그가 승승장구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언되었음을 지적하여 더욱 깊은 환심을 샀다. 그런데 알렉산더 대왕의 팔레스틴 정복은 기원전 332년경의 사건이다.

만약 비평가들의 주장대로 다니엘서가 기원전 165년까지는 쓰여지지 않았다면 이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인정받는 역사가 요세푸스는 대단한 거짓말장이가 된다. 요세푸스가 자기 때로부터 300년 이내인 마카비 독립시대의 사건에 무지(無知)했을 리도 없을 뿐더러 알렉산더 대왕이 팔레스틴 일대의 친 페르샤적인 모든 도시들을 파멸시켰으면서도 예루살렘만은 호의를 베푼 사실에 어떠한 이유가 있음이 분명한 것이다. 이와 함께 다음의 방증을 연관시켜 볼 때 더욱 분명해 진다.

2. 마카비서(Maccabes)의 증언

1.다니엘서가 인용됨

그런데 바로 기원전 2세기 후반기에 기록된 당대의 역사 기록으로 외경(外經)에 속하는 마카비서에 이미 다니엘서가 인용돼 있다는 사실이다. 즉 마카비1서(공동번역:마카베오 상) 1장 54절은 다니엘서 9장 27절, 11장 31절, 12장 11절의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또한 같은 책 2장 49-79절에는 애국애족의 경건한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임종시 아들들에게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의 본을 받으라고 교훈하는 감격적인 유언이 적혀있다. 다니엘서가 그 훨씬 이전에 기록되지 않고서 어떻게 이 기원전 2세기의 역사책에 인용될 수 있겠는가?

2. 당시에는 선지자가 없었음

또한 마카비1서 4장 44-46절에는 기원전 165년에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하게 하려 할 때 그들에게는 당장 아무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썼다. 그 뒤 22년 후인 기원전 143년에도 그들 가운데 선지자가 없기 때문에 마타디아스 제사장의 생존한 아들인 시몬을 그들의 지도자자와 대제사장으로 추대한다고 했다(마카비1서 14장 41절). 같은 언급이 같은 책 9장 27절에도 기록돼 있다.

만약 이러한 마카비시대에 다니엘서와 같이 명백한 예언과 기별에 가득찬 예언의 선물을 지닌 선지자적인 인물이 있었더면 그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당대에 그러한 기록을 쓴 사람도 알지 못했고 그러한 선물도 갖지 못했음을 확증한 것이다.

3. 구약성서 정경(正經) 목록의 증언

다니엘서는 엄연히 고대 히브리성경의 정경 목록(目錄)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었다. 히브리 구약성경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처음 부분은 모세 오경을 가리키는 율법서(토라 Torah), 두번째 부분은 선지서(네비임 Neviim)인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등 네 책을 초기 선지서로 불렀고 후기 선지서로는 예레미야, 에스겔, 이사야 그리고 나머지 12 소선지서를 한 책으로 간주하여 포함시켰다. 세번째 부분은 케투빔(Kethuvim)이라고 부르는 성문서(聖文書)로 여기에는 룻기, 시편, 욥기, 잠언, 전도서, 아가,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 에스더, 에스라(느헤미야와 한 책), 그리고 역대서등 11개의 책이 포함되어 있다.

주지하는대로 구약성경은 기원전 5세기 끝 이전에 기록이 완료되었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선지자에 의해 수집이 끝났음이 분명하다. 기원전 400년 이후에는 어떠한 책도 그 이상 구약의 정경 목록에 들어가지 못했다. 기원전 2세기의 기록인 마카비1서가 그렇게 탁월하여 루터까지도 성경에 포함시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정도였으나 정경에 포함될만큼 연대가 오래지 못하고 권위가 뒷받침되지 못하여 외경(外經)으로 남게 되었다. 기원전 180년경에 편집된 집회서(Ecclesiasticus)도 당시의 유대인들의 지배적인 사상을 훌륭히 표현하고 있는 훌륭한 문헌이면서도 위와 같은 이유로 외경으로 밀려났다. 잠언이나 전도서, 에스더서등은 과거에 정경성을 의심받은 적도 있지만 "정경성에 대한 다니엘서의 권리는 고대 유대인 회당들에서라고 결코 의문시된 적이 없었다"고 보증받고 있다.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에 쓰여졌다면 어떻게 그 엄격히 통제된 구약 히브리 성경 정경 목록에 일찍부터 포함될 수 있었겠는가? 기원전 5세기 끝무렵의 말라기 선지자를 마지막으로 그 후에는 침례요한의 때까지 아무 선지자도 없었고 동시에 아무 책도 덧붙여질 수 없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 유대인들이야말로 그들의 거룩한 책들에 관하여 가장 세심한 배려를 한 민족이다. 그들의 역사 초기에 서로 맞서는 두 분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일어났으며 바로 그들의 견해의 성질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대적하기 위해 각성했던 차제에 진실하고 정당한 것임이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고서는 거룩한 정경에 포함된다는 것이 불가능했었다.』

다니엘서가 왜 선지서 구분에 들지 못하고 성문서(聖文書) 구분에 들어갔는가는 다니엘서의 권위나 역사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 까닭은 다니엘 자신이 소년 시절 고국 유다를 떠나 평생을 이국 바벨론에서 정치가로 지냈기 때문에 비록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 해도 동족 유대인들에게는 선지자(Nabhi)로 불리우기 보다 오히려 선견자(先見者 hozeh)나 현인(賢人 hakam)으로 여겨졌다. 고로 오직 선지자로 불리운 사람들만의 기록인 선지서 구분에 들지 못하고 솔로몬이나 다윗등 현인이나 비선지자들의 영감된 기록인 성문서에 적절히 포함된 것이다.

4. 다니엘서에 쓰여진 아람어의 증언

아람어(the Aramaic language)의 근원을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아람어는 노아의 아들 셈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아람(Aram)의 자손들의 언어로 주로 메소포타미아 북부지방과 시리아 지방에 살고 있던 아람인에 의해서만 사용되었었다. 그후 앗시리아가 아람인들을 정복하고 제국 여러 곳으로 추방하면서 널리 보급되어 앗시리아의 관리들과 상인들의 공용어(公用語)가 되었다.

2. 아람어가 성경에 최초로 쓰여진 기록은 기원전 17세기 라반에 의하여서인데 그는 야곱과 언약을 맺은 후 세운 돌을 "증거의 무더기"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인 "여갈사하두다"(Yegar Sahadutha)로 불렀고 야곱은 같은 의미의 히브리어 "갈르엣"(Galeed)이라고 칭하였다(창 31:47).

3. 히브리어와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아람어는 기원전 701년 유다왕 히스기야의 관리들도 이해하고 있었는데 앗시리아 사절들에게 아람어로 말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왕하 18:26).

4. 신바벨론 시대 즉 다니엘 당시에 아람인들에 밀접했던 야긴(Yakin) 가계에 속한 갈대아(Chaldean)인들이 지배 계급으로 등장하면서 아람어는 바벨론 제국에 두루 펴졌다. 다니엘의 경우처럼 느브갓네살의 조신(朝臣)들이 왕에게 아람어로 말했음은 당연한 일이다(단 2:4).

5. 그 후 페르샤가 근동지방을 다스리게되자 아람어가 세계적 언어임을 알고서 이를 페르샤의 공용어(公用語)로 채택하여 조서도 아람어로 공포했기 때문에 에스라도 이를 그대로 인용했고 관리들도 공문에서 아람어를 썼음을 엘리판틴 파피러스(Elephantine Papyri) 문서의 발견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6.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뒤에도 아람어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의 일상 언어가 되어 예수께서도 아람어를 구어(口語)로 사용하신 것이다.

신구약 성경 여러 곳에 아람어가 인용돼 있는데 특히 다니엘서의 1/2에 해당하는 부분인 2장 4절 -7장 28절까지와 에스라서의 1/3에 상당하는 4장 8절-6장 18절 7장 12절 -26절이 아람어로 쓰여 있다.

다니엘은 소년 시절 바벨론으로 잡혀가 거기서 정통적인 아람어를 배웠고 공식적인 용어로 썼다. 에스라 역시 바벨론에서 자라나 페르샤 시대까지 아람어를 공용어(公用語)로 쓰며 살았다.

에스라서에 쓰여진 아람어 부분은 예루살렘 중건(重建)에 관한 페르샤 제국의 조서인데 그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 부분은 고레스 원년에 내린 조서로 기원전 537년경의 아람어이고 마지막 부분은 아닥사스다왕 7년 즉 기원전 457년경의 아람어이다.

다니엘서의 아람어는 뒷 부분의 경우 벨사살 원년 즉 기원전 553년경이 된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아람어와 에스라서의 아람어 사이에 빠르게는 16년(553-537), 멀게는 96년(553-457)의 상거 밖에 없는 셈이 된다.

그런데 다니엘서에 쓰여진 히브리어는 에스겔서의 히브리어와 같은 기원전 6세기의 문체(文體)이고 다니엘서에 쓰여진 아람어는 에스라서의 아람어와 꼭 같은 기원전 6세기의 공용어(公用語) 문체인 것이다. 에스라서가 기원전 6세기의 문서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다니엘서가 바로 기원전 6세기의 다니엘에 의해 쓰여진 문체임에 틀림 없는 것이다.

5. 사해(死海) 사본의 증언

주지하는대로 2차대전 직후인 1947년 봄 사해의 서북방 해안 가까이의 유대광야에서 잃어버린 염소를 찾던 아랍인 목동(Muhammad ed Dib)에 의해 쿰란(Qumran)으로 불리우는 황량한 산비탈 일대의 동굴들에서 최선의 상태로 보존된 최고(最古)의 구약성경 사본(寫本)을 대량으로 발견해 내는 20세기의 기적을 보게 되었다.

감정 결과 적어도 11개의 동굴들에서 나온 이 사본들은 대부분 기원전 2세기에 필사(筆寫)한 것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바로 쿰란 제1 동굴에서 발견된 수백개의 사본 단편들 가운데 다니엘서의 22개 절이 쓰여진 세 개의 단편(1:10-17, 2:2-6, 3:22-30)이 나왔다.

특히 2장 2-6절 부분 즉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바뀌는 부분인 4절부터는 역시 아람어로 쓰여 있었다. 그후 제4 동굴에서 나온 90여개의 구약성경 사본 가운데 다니엘서의 사본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제11 동굴에서도 또 다시 다니엘서 사본 2개가 다시 발견되어 다니엘서가 이미 기원전 2세기 훨씬 이전 틀림없이 기원전 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밖에 없는 정통적인 구약 정경임이 고고학으로도 확증된 것이다.

6. 동시대의 선지자 에스겔의 증언

에스겔 선지자는 제사장 출신으로 유다의 국운(國運)이 기울던 기원전 597년 여호야긴왕을 비롯한 일만명의 유대인과 함께 제 2차로 바벨론에 포로돼 갔다(왕하 24:10-16, 대하 36:9,10, 겔1:1-3). 포로 당시의 그의 나이가 25세쯤이었을 것인데, 그는 바벨론 땅에서 22년 간(593-571BC) 선지자의 직분을 성실히 수행했다. 이리하여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 고토(故土)에 남아 있는 동족을 위하여, 다니엘이 바벨론의 궁전에서 봉사하고 있는 동안 에스겔은 바벨론에 잡혀 온 유대인 동족을 위해 봉사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에스겔이 같은 시대에 같은 나라 바벨론에서 함께 평생을 살아 온 동료 포로 정치가-선지자인 다니엘에 대하여 3회나 언급하고 있다는 있음직한 사실이다(14:14, 20, 28:3). 이상의 세 귀절에서 에스겔은 구약의 의인 노아와 욥과 함께 다니엘을 꼽고 있다. 다니엘은 이미 생전에 살아 있는 의인으로 간주된 것이다. 에스겔이 그의 책을 그의 선지자 직분을 끝낼 무렵인 기원전 571년경에 썼다고 한다면 그 때의 다니엘의 나이는 대략 52세쯤이 되었을 것이다. 대제국의 총리를 역임하며 그 흠 없는 생애를 살면서 동족을 위해 그토록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다니엘을 에스겔이 그의 책에서 언급했음은 자연스럽고 확실한 방증이 되는 것이다.

7. 사도 요한과 바울의 증언

요한은 계시록에서 10회 이상 다니엘서의 예언과 표상을 인용하고 있다. 만약 다니엘서를 구약 정경으로 확신하지 않는다면 계시록은 물론 그 밖의 요한의 기록도 의심할만 할 뿐더러 요한 자신의 사도적 권위에 대해서도 결함(缺陷)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방인의 사도인 사울도 적어도 그의 세 편지서에서 다니엘서를 인용하고 있어 다니엘서의 정경성 여부는 사도 바울 서신의 정경성과도 불가분한 것이다.

☆ 요한계시록에 인용된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1:7, 17:14

1:13-16, 2:18

1:17

10:5, 6

13:5-7

20:1

20:5, 6, 15

(다니엘서)

7:13, 14, 27, 2:45, 8:25

10:5, 6

10:8-11

12:6, 7

7:8, 11, 21, 25

2:35

12:1

☆ 바울 서신에 인용된 다니엘서

히 11:13, 14 단 3:25, 6:22
살후 2:3, 4 단 7:20, 25
고전 6:2 단 7:22

8. 예수 그리스도의 결론적인 증언

이상의 여러 증언 외에 우리는 다니엘서의 선지자적 직분과 다니엘서의 정경성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결론적인 확증을 가지고 있다. 감람산 위에서의 마지막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과 세상 끝을 예언하시면서 다니엘서의 예언을 인용하시고 강조하여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마 24:15, 막 13:14참조)의 말씀을 전제로 다니엘서 9:27, 11:31, 12:11의 예언을 직접 인용하셨다. 의심의 여지없이 예수께서는 다니엘서의 기자가 다니엘임을 확인하셨고 다니엘을 선지자로, 다니엘서를 정경(正經)으로 확증하신 것이다.

그 밖에도 아래와 같이 복음서의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는 다니엘서를 인용, 또는 배경으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정경성을 의심하거나 비평하는 사람은 신분과 이유를 막론하고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불신은 물론 복음서에 대한 권위도 부인하는 바가 되어 결국 불신자요 반성서적인 입장임을 자인하는 결과가 되고 만다. 아래에 복음서에 인용된 다니엘서의 사례와 든다.

☆ 복음서에 인용된 다니엘서

마 24:15, 막 13:14 단 9:27, 11:31, 12:11
마 24:30, 26:64 단 7:13, 27
마 16:27, 28, 25:31 단 7:13, 14, 27
마 24:21 단 12:1
요 5:28, 29 단 12:2
마 13:43 단 12:3

나. 헬라어 사용에 대한 비평과 반증

다니엘서의 아람어 부분(2:4-7:28)인 3장 5절에는, 세 마디의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이 사실을 들어 비평자들은 다니엘서가 기원전 6세기 기록이 아니라, 헬라 문명이 보급된 이후인 기원전 2세기쯤에 쓰인 증거라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이 세 마디 헬라어는 모두 악기 이름으로 바벨론의 여러 관현악기(管絃樂器) 가운데 포함돼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어떻게 바벨론 사람들이 헬라어 악기를 쓸수 있었겠는가.

이러한 비평은 고고학의 증거로 반증되었을 뿐더러 오히려 다니엘서의 진실성을 드높이는 결과가 됐다. 즉 바벨론의 문서 보관소에서 발굴된 느브갓네살 당시의 설형문자 점토문서에서는 소아시아의 서안 지방의 그리이스 식민지로 헬라 문화권에 들어간 이오니아인(Ionian) 들과 리디아 사람들이, 바벨론의 건축사업을 위해 고용돼온 여러 외국인 가운데 포함되어 있었으며 이들 건축기사나 공예인들이 필경 저들의 악기를 휴대하였음에 틀림 없다. 당시 동쪽과 서쪽 간에 폭 넓은 문화교류와 인적(人的) 교류가 있어 병정들과 장인(匠人)들 건축기사들이 왕래 했음이 역사적으로 입증되었다.

더구나 악기 이름은 대개 어느 나라에서나 본래의 이름을 그대로 써서 이탈리아의 악기 이름인 피아노(Piano)나 비올라(Viola)를 어디서나 그대로 부르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세개의 헬라 악기도 본이름 그대로 불리운 것이다. 만약 비평가들의 말대로 다니엘서가 기원전 2세기 기록이라면 저자가 왜 헬라어를 세 마디만 썼겠는가 그 당시에 쓰여진 마카비 1서와 2서에서처럼 헬라의 문물(文物)과 제도(制度)가 짙게 풍겼어야 했을 것이다.

다. 바벨론의 마지막 왕에 관한 시비와 반증

다니엘서 5장에 소개되어 있는 바벨론 함락 당시 죽임을 당한 마지막 왕인 벨사살의 존재와 신원은 20세기 초엽까지도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었다. 이러한 사실은 비평가들에게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불신하는 유력한 논증이 되었었다. 당시까지 밝혀진 연대기에 의하면 바벨론의 마지막 왕은 나보니더스(Nabonidus)였지 벨사살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고학의 공헌으로 마침내 결정적인 빛이 이르렀다. 즉 1924년 시드니 스미스(Sidney Smith) 가 대영제국 박물관에 소장돼 있던 자료를 확인하여 [나보니더스에 관한 이야기]( Verse Account of Nabonidus)를 출판했는데 그 내용에서 나보니더스가 자기의 맏 아들 벨사살에게 "왕권을 위임하였다"는 분명한 진술이 나타남으로써 말끔이 해결되었다. 이러한 다니엘서의 승리는 너무나 극적인 것이어서 비평자들에게 거의 치명적인 타격을 주기에 이르렀다(다니엘서 5장에서 상세히 다룸).

라. 바벨론의 건설자에 대한 시비와 반증

20세기 초인 1889년부터 1917년에 걸치는 장장 18년동안 독일의 고고학자 로버트 콜더베이(Robert Koldewey)가 고대 바벨론성을 발굴하기까지 바벨론성의 크기와 규모 및 건설자에 대하여 별로 알려진 것이 없었고 당시에 그리스의 역사가를 통해 알려졌던 사실들은 다니엘서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이 많았다.

특히 그리스의 역사가에 의하면 느브갓네살은 고대 역사에서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고 바벨론성의 대건설자는 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삼무라마트(Sammuramat)로 불리우는 앗시리아의 모후(母后)로 그의 어린 아들 아다드니라리 3세(Adad-nirari Ⅲ)을 위해 섭정했던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바벨론성을 건설했고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백년 동안 계속된 고고학의 발굴을 통하여 느브갓네살은 명실공히 대왕으로 다니엘서의 진술처럼 "이 큰 바벨론"(단 4:30)을 건설했음이 여러 비문과 건축물들 그리고 심지어는 느브갓네살의 이름이 설형문자로 찍혀진 벽돌까지 발굴해냄으로써 더할 나위 없이 확실해졌다(사진 참조).

재위 43년 동안 느브갓네살은 적어도 세 개의 화려한 궁전을 건축했는데 동쪽 새 시가지에 위치한 하기 별궁 (夏期 別宮), 내성 북부 성벽 밖에 있던 중앙궁, 그리고 내성 서북쪽 모퉁이의 남궁(南宮)등이었다.

주신(主神)인 마르둑(Marduk)의 신전인 에사길라(Esagila)는 고대 동양의 모든 신전 가운데 가장 장대한 복합 신전이었으며 신전고탑(神殿高塔)인 에테메난키(Etemenanki)는 칠 층으로 그 높이가 300피트를 초과했다.

그 밖에 고대 세계의 칠대경이(七大驚異) 가운데 하나인 가공원(架公園 Hanging Garden)은 느브갓네살이 왕후인 메대왕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공주 아미티스(Amytis)가 고국 메디아의 산과 숲을 그리워하기 때문에 그 평평한 바벨론 평지에 인조(人造) 동산을 만들어 펌프로 물을 끌어 올려 관개(灌漑)한 경이의 공원이다.

이 밖에도 아직까지 폐허 위에 40피트나 솟아있는 바벨론성의 주문(主門)인 화려하고 장대한 이슈타 게이트(Ishtar Gate)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건물들이 바로 다니엘서의 진술처럼 느브갓네살이 건설한 것이었으며 전설적인 세미라미스 모후(母后)는 그리스의 역사가의 고전 기록과는 달리 바벨론 건축과 하등의 상관이 없음이 밝혀진 것이다.

지금 베를린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느브갓네살 당시의 비문 하나에서만도 이 사실은 아주 분명하여지는데 아래에 적힌 비문의 내용과 다니엘서 4장 29, 30절의 내용을 비교하면서 느브갓네살의 건축에 관한 다니엘서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가를 고증(考證)하여 보자.

[나는 거룩한 도시요 위대한 도시들의 영광인 바벨론을 전보다 탁월하게 만들었고 그 재건을 장려하였다. 나는 신들과 여신들의 신전을 낮과 같이 환하게 불을 켜게 하였다. 모든 왕 가운데 내가 마르둑을 위하여 대대적으로 건축한 것 같이 신축한 왕은 하나도 없었으니 곧 전에 있던 왕은 건축한 일이 없었다. 나는 또 에사길라 신전의 시설을 더욱 늘렸고 바벨론을 일찌기 한 적이 없으리만큼 쇄신하였다. 나의 모든 가치있는 사업들, 곧 나의 선왕들보다 더 많이 한 위대한 신들의 성전을 미화하는 사업은 문헌에 기록하고 오는 세대를 위해 그 것을 써 두었다. 나의 명이 길고 내가 자손에 대해 즐거워 하기를 바라며 나의 후손의 검은 머리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며 나의 이름이 장래에 영구히 선양되기를 바란다.]

[열 두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궁(宮)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가로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도성을 삼고 이 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단 4:29, 30).

이렇듯 피할 수 없도록 완전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의 역사성을 앞장서서 비평해 온 하버드 대학교의 파이퍼(R. H. Pfeiffer) 교수는 이를 시인하고 고백하는 대신 아래와 같은 말로 비켜나가고 있다.

[우리는 추축컨데 우리 저자가 발굴이 증거한대로 느브갓네살이 신바빌로니아를 건설한 줄을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참으로 이들 고등비평자들이야말로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믿지 않기로 결심한 사람들 같아서 예수님의 나사로의 비유에서의 말씀처럼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눅 16:31)하신 말씀을 기억나게 한다.

마. 다니엘 1:1절과 예레미야 25:1의 연대 차이에 대한 비평과 반증

단 1:1 "유다왕 여호야김의 위에 있은지 3년에 바벨론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그 것을 에워쌌더니 "

렘 25:1 "유다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 곧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원년에 "

이상의 두 성경절에서 예레미야서에는 여호야김 4년이 다니엘서에는 여호야김 3년이 느브갓네살의 원년인 것으로 표현되어 있어 명백히 시대 착오(錯誤)라고 비평가들이 주장해 왔다. 이런 경우 역사성에 있어서 인정받는 예레미야보다 다니엘서가 비평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당시의 바벨론에서는 유다에서와 같이 왕들의 재위년(在位年)을 계산함에 있어서 소위 [즉위년(卽位年) 계산법](the accession-year method)을 썼음이 밝혀짐으로써 적절한 해답을 찾았다. 즉위년 계산법이란 만약 "갑"이란 왕이 그의 재위 35년째 죽었다면 그가 죽기 전까지는 그의 이름으로 연대를 쓰지만 뒤를 잇는 "을"이란 왕은 그 35년째 해의 마지막 부분을 자신의 이름으로 문서의 연대를 표기하기는 하나 다음 해 정월이 되기까지의 여분의 기간을 단순히 "통치가 시작된 해"(year of beginning of reign) 곧 "을"왕의 즉위년(卽位年)이라 부른다. 그리고 다음 해 정월 초하루(Nisan 1)부터 "을"왕의 원년(元年)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같은 해가 중복으로 계산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계산 방법이었으나 이집트에서는 자주 선왕(先王)이 죽은 해가 곧 다음 왕의 원년이 되어 중복이 되는 "비 즉위년 계산법"(non -accession-year method)을 썼다.

느브갓네살의 경우 기원전 3세기의 바빌로니아의 제사장이요 역사가인 베로수스(Berosus)의 고대 역사를 인용한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느브갓네살의 아버지 나보포랏살은 팔레스틴 지방의 국가들이 친이집트 정책으로 기울어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식에 접하여 즉시 그의 젊은 아들 느브갓네살에게 병력을 주어 이를 평정하도록 했다. 그가 유다를 포함한 팔레스틴의 여러 반역한 국가들을 정복하고 남하하여 이집트 국경에서 전역(戰役)에 종사하고 있던 때 본국으로부터 부왕이 서거했다는 부음(訃音)이 왔다.

느브갓네살은 황망히 유다와 페니기아와 시리아의 포로들을 동료 장군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소수의 수행원을 거느리고 아라비아 북부의 사막길을 가로질러 본국에 돌아가서 안전하게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발굴된 당시 바빌로니아의 점토문서에 의하면 나보포랏살 제5년에 월식(月飾)이 있었는데 천문학적으로 확인해 보면 그때가 기원전 621년 4월 22일이 된다. 나보포랏살은 21년 간 재위했으므로 그의 죽음은 기원전 605년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실제로 바벨론에서 발굴된 점토 공문서의 날짜를 종합해 보면 나보포랏살의 죽음은 기원전 605년 7월이나 8월 상순에 있었다. 그리하여 느브갓네살은 다음 해 기원전 604년 정월 초하루 바벨론의 주신 벨(Bel 마르둑)의 손들을 잡은 후 원년을 시작한 것이다.